그리하여 50~60년대 농악을 주로하는 종합예술 단체로는 전국최초로 유랑 순회공연을 다니며 오랜 기간동안 타의추종을 불허하며 최고의 흥행과 당대 으뜸이라는 명성이 자자했던 백구여성농악단이 전무후무한 전성기를 구가하였고 그로인하여 백구농악이 전국화 되는 계기가되었다.
이때 쇠면 쇠 장구면 장구 하며 이름을 떨치시던 이준용 선생님 그의 자재이신 이부산 명인이 어린나이에 백구여성농악단을 따라다니며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호남우도농악과 국악 민요 소리장단등 여러 다양한 가락을 익혀 독보적인 위치를 점유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후에 아버지와 같이 전국을 가락따라 소리따라 인정따라 세월따라 흘러흘러 전국각지 난장놀이판을 유랑 다니던 중 삼천포12차 농악에 발탁 입문하여 중요무형문화재 제11-가호 진주삼천포 12차농악 전수조교의 자리에 오르게된다 그러한 연유로 현재 경기도립 국악단 사물수석으로 있는 이부산명인을 영남가락과 호남가락을 아우르는 영호남의 명인이라 불리어지게 되었던겄이다
백구농악대와 백구여성농악단에서 그일원으로 활동했음을 명예와 자부심 자랑으로 여기며 지금도 무형문화재등 호남우도 농악계의 중추 지도원로로 일컬어지는 분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아 백구농악의 역사적 전통적 문화적 계승성의 혈맥의 강은 자애로운 어머니의 품과같이 여유롭고 자연스럽게 구비치는 만경강의 그 도도한 흐름과같이 세월을넘고 또넘어 그빛을 더하고있다.
뒤를이은 백구농악단이 현재의 명맥을 유지하며 현존하는 농악계 최고의 원로이신 무형문화재7-9호이준용선생님과 의주선생님등 그의 제자들은 무형문화재7-9호 보존회를 결성 전수조교 유기열회장을 주축으로 총본부를 백구면 사무실 앞 전수실에 두고 그 지부를 공덕과김제 익산 서울에 두고 활발히 활동을 하며 후진양성에 힘쓰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백구정 나룻터 |